작가 노트

작가 노트

전시장을 빈 공간으로 만들어 관객을 놀라게 하고 도발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해왔던 수법이다. 물론 나는 전시장에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거나 아예 전시장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작품을 보러온 관객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역설은 이번 전시의 핵심을 이루는 생각이다. 거대한 공간과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예산이 주어진 전시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화려한 구경거리를 배제하고 공간을 비우고 물질의 무게를 내려놓는 데 집중하려 한다. 이런 발상 자체가 모험적이고 전복적이라는 데 매력을 느낀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을 관객의 상상력이 채우게 되기를 기대한다.

뭔가로 채워져야 할 공간을 비워내는 것, 완성된 결과물(오브제, 스펙터클)이 아니라 전시 공간 안에서 생산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생산자로서의 작가와 소비자로서의 관객의 역할을 뒤섞는 것. 어떤 대상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일로부터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는 일로 옮겨가는 것…

손수건, 금붕어 연못, 화분, 피아노, 자전거, 커튼 같은 일상의 소박한 물건들이 낯선 모습으로 각자의 일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손수건은 끝없는 추락, 투하, 활강을 위해 계속해서 천장으로 끌어올려지고, 금붕어는 주어진 공간을 헤엄치지만 결코 다른 물고기들을 만나지 못하는 고독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손수건은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최종적인 추락의 결말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른 금붕어들을 볼 수 없는 금붕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화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허공에서 다른 것들과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느리게 잎사귀들을 키운다. 피아노는 연주를 멈추기 위해 매일 건반 하나씩을 빼놓는 침묵의 조율사와 절망적인 2중주를 계속하는 중이고, 자전거는 페달을 밟는 사람의 수고에 대해 시 한 편을 읽어주는 보상을 내놓는다. 벨벳 커튼은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은 미로 속으로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고 다시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나타나게 한다.

전시장의 구경거리들은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관객의 감각을 사로잡는 화려한 자극이 최소화된 오브제와 사건들이 전시를 지배한다. 관객은 종결되지 않고 진행 중인 작품과 사건 속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그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참가자이고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일시적 공동체가 된다. 소극적인 관람객에서 적극적인 참여자, 생산자가 된다. 1천 명의 책이나 기억의 벽에는 다수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시적 공동체에 대한, 그것이 내놓는 열린 결말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 들어 있다.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전시 제목은 마종기 시인의 시 제목에서 가져왔습니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 시의 전문을 아래에 게재합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1. 옥저의 삼베

중학교 國史時間에 東海邊 함경도 땅, 沃沮라는 작은 나라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꿈에 나는 옛날 옥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조랑말을 타고 좁은 산길을 정처 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조랑말 뒷등에는 삼베를 조금 말아 걸고 건들건들 高句麗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삼베 장수가 된 것이 억울해 마음을 태웠지만 벌써 때 늦었다고 포기한 채 씀바귀 꽃이 지천으로 핀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딴 나라의 큰 마을에 당도하고 금빛 요란한 성문이 열렸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잊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곳에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옥저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도 혼자서 이 큰 곳에 살아야 할 것이 두려워 나는 손에 든 삼베 묶음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참았습니다. 그때 그 삼베 묶음에서 나던 비릿한 냄새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삼베 냄새가 구원인 것처럼 코를 박은 채 나는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안녕, 안녕 계속 헤어지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헛다리를 짚으면서도. 어느덧 나는 삼베 옷을 입은 옥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래 전 국사 시간에 옥저라는 조그만 나라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2. 己亥年의 江

― 슬픔은 살과 피에서 흘러 나온다.
     己亥 殉敎 福者 최창흡

이 고장의 바람은 어두운 江 밑에서 자라고
이 고장의 살과 피는 바람이 끌고 가는 方向이다.
西小門 밖, 새남터에 터지는 피 江물 이루고
脫水된 영혼은 先代의 江물 속에서 깨어난다.
안 보이는 나라를 믿는 안 보이는 사람들.

희광이야, 두 눈 뜬 희광이야,
19세기 조선의 미친 희광이야,
눈 감아라, 목 떨어진다, 눈 떨어진다.
오래 사는 江은 향기 없는 江
斬首한 머리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한 나라의 길고 긴 슬픔이다.

3. 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출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 시인선 2), 문학과지성사, 1980.